2010년 02월 16일
공자 춘추 전국시대를 보고 느낀점...

# by | 2010/02/16 16:29 | 미분류 | 트랙백 | 덧글(0)

# by | 2010/02/16 16:29 | 미분류 | 트랙백 | 덧글(0)

그런대 의아한점이, 만리장성 설이 입에 많이 오고 가지만 또 하나는 몰르고 있는 분들이 많은 것이 저의 생각으론 이해가 도무지 안가더군요..
하여튼, 오늘은 이 만리장성 설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볼까 생각합니다.
저번에 재가 부흥에서 이런글을 올린적이 있었지요. 물론 만리장성 설에 대한 반박글 입니다.
그런대, 만리장성은 청천강 까지 같다고 대부분 사람들이 믿는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최근 학계에서 이 설은 인정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국사의 이해를 보시면 연의 장성이 요하 까지 되어 있습니다.
즉, 청천강 까지 같다는 설은 학계에서 불신한다는 소리 입니다.
(한국사의 이해. 19p )
학계에서 이 설은 인정한다는 말을 하신 분은.. 어떤 근거로 말하시는지는 잘 몰르갰지만, 말이죠.
여튼,
내몽골 지역에 고구려 성벽이 출토 되었다고 하더군요.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903251455005&code=900315
그런대 학계에서도 역시나 불신 합니다. 이유는 실증사관에는 없었던 소리 였기 때문입니다.
뭐.. 저도 이런점에서 동의합니다. 사료에 없으니 말이죠.
러시아에 한국 아파트 있었다고 그 나라의 최대 영토로 보긴 어렵죠.
그런대 따지고 보면 한국 아파트 를 비유한 거 와 같이, 지금 이 만리장성 설에도 인용을 한번 해보죠.
" 중국에 한국돈이 넘쳐나더라, 즉 이것은 무역이 아닌 한국이 점령했다는 증거 이다."
( 대략 500년 뒤 교과서에서 한국영토 에 대한 글귀 중...)
자. 한번 따져보죠, 세상 살면서 이런 정신나간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아마 없을껍니다.
저 위에 비유한거와 같이 다른 나라 영토에 한국 을 상징하는 돈,건축,등 이 있으면 그 영토로 편입하는거 자체가 위험한 행동이라기 보단, 너무 유물사관론에 집착하는거와 마찬가지죠.
물론 유물사관은 매우 중요하지만 자칫 먼나라 한국사가 되버릴수도 있으니 말이죠.
(실증사관으로 only 보는 것도 매우 안 좋은 현상입니다. )
본론으로 들어가서, 청천강 이북에 명도전이 출토되었다고 장박천은 말하는것 같은대요.
확실히 단도직입적으로 따지면 재가 말한 비유 를 한번 봐주시면 하는 생각이더군요.
연나라 화폐인 명도전이 청천강 이북에 출토 되었다고 하는 소리는 바로 저 위에 한국돈 을 비유 한거와 같은거나 마찮가지 입니다. 화폐는 그 영토로 인식해 주기엔 그 강역과 연결시킬수 없습니다.
대부분 무역이나 하는 정도로 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볼까요?.
전에 경주 시내 근처인 계림로 14호 에서 진귀한 보검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런 보검이 중국,고구려,백제,왜 에서 발견되지 않은 진귀한 유물이죠. 그런대 이상한 점은
이 보검은 5세기에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훈족의 아틸라왕 시대에 유행했으며, 그리스ㆍ로마ㆍ이집트ㆍ서아시아에서 장식 검으로도 쓰였습니다.
여튼, 이 보검이 신라 영토와 연결시켜줍니까? 어이쿠, 그러면 신라 영토는 어마어마 하게 방대한 영토를 누볐군요. 대략 학계의 추측은 무역을 했을꺼라는 추측입니다만 아직 이 보검에 대한 정보는 별로 안나오더군요...
일반 지식인 분들은 대부분 중국 고고를 믿는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책을 비판적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저의 생각입니다.
1941년 김육불이 고구려가 중화민족 의 일원임을 주장한 이래, 일부 중화인민공화국 학자들은 고구려사가 자국사라 주장 합니다.
그러다가 1980년 대 말 이래 '현재 중국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역사는 모두 중국사라는 이른바 다민족통일국가론을 강조' 합니다.
여튼, 저는 이재 할말 끝났습니다.
한번 여러분들이 말씀 해보셨으면 합니다.
만리장성이 정말 청천강 까지 같는지 만약에 같으면 옛 사료 의 근거를 덧글에다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만리장성 설에 반론 하실분은 반론 하시면 됩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 by | 2009/06/14 11:34 | 한국사(고대~중대) | 트랙백 | 덧글(6)






# by | 2009/02/16 10:50 | 세계사(고대~중대) | 트랙백 | 덧글(6)

# by | 2009/01/28 18:08 | 게임잡담글 | 트랙백 | 덧글(0)
요즘 저 멀리 서쪽 영토에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쪽이 시끌벅적 합니다.. 이유는 다들 아시다시피" 성지를 다시 되찾을려는 21c 십자군 원정 입니다.. " 라는 명목으로 가자지구를 맹폭격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위치는 아직도 정확히 알려져있진 않지만 외국 역사학자들의 증언들을 보면 사해의 북쪽 유대아 산맥의 언저리 에 기원전 약 3000년경 사람들이 부락을 이루어 살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답니다...

[예루살렘 도시 전경] [도시 행정상 동과 서로 나누어져 있다고 합니다..]
"유대인은 예루살렘에 가면 '통곡의 벽'을 찾아 통곡한다. 유서 깊은 유대교 성전을 로마 군이 파괴한 뒤 이 성전의 잔해에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 천주교인은 그 곳에 가면 골고다 언덕을 애써 오르고 성묘 교회에서 기도를 올린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고, 그 묘에 묻혔기 때문이다."...

[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그러나 성지 회복은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구실에 지나지 않고 실제로는 동방정교회를 로마 카톨릭 관할권 아래 흡수, 통합시키고 교황권을 확대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있었습니다.. 당시 서유럽 내 영주의 장남 이외의 아들들은 상속권을 부여받지 못했디 때문에 미지의 땅에 대한 욕구가 강했습니다.. 또한 도시 상인들의 시장개척에 대한 요구 등 종교적인 측면과 경제적인 측면에서 십자군 원정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 되었도 이 밖에 서유럽 각계각층의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서 십자군원정이 단행되게 됩니다....

[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 원정을 호소하는 교황 우로바노 2세]
중세 서유럽.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은자 피에르라는 광신도를 이용하여 교묘히 전쟁을 선동합니다.. 1095년에 교황 우르바노 2세가 로마 카톨릭교도들에게 이슬람교에 대한 군사 행동을 호소하여 전쟁에 참가하는 자에게는 '대사'를 주겠다고 반포하였습니다... '대사' 란?.. 라틴어로 lndulgentia , ' 은혜' 또는 '관대한 용서' 라는 말로써 '대신 용서하다' 라는 의미 입니다.. 카톨릭 의 신학에 따르면 이미 용서받은 죄에 따른 벌, 즉 잠벌을 탕감받기 위해서는 현세에서 행하는 속죄인 보속을 치루어야 하는데, 이를 일부 또는 전부를 감면해주는 은사(恩駟 ) 를 말합니다..
즉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성당에서 사실대로 고백하여 죄를 용서받은 다음 예수와 모든 성인들의 보속 공로를 통해서 그 죄에 해당하는 벌을 교회의 승인을 받아 면제 받게 됩니다.. 현재는 이걸 '고해성사' 라 하며 요즘 보속 공로 없이 즉시(?) 죄를 면제 받게 됩니다...

[1521년에 사용한 '대사' 부여증 입니다.. ]
여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그에 따라 레몽, 고드프루아, 보에몽 등 여러 쟁쟁한 인물들이 성지를 회복(노략질) 하러 떠납니다.. 그런데 그에 앞서 은자 피에르가 엉뚱한 생각을 품고 기사 레이날도, 무일푼의 발터와 함께 한발 앞서 떠납니다.. 이를 군중 십자군(1096년) 이라 하는데 그들은 시작부터 말썽을 일으켰습니다.. 우선 그들은 예루살렘을 향한 방향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이 있는 대략 동쪽으로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독일에서 유대인을 학살하고, 베오그라드에서도 약창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헝가리 왕국의 기병대의 반격을 받고 군사의 태반을 잃었으며, 베오그라드에서도 약탈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헝가리 왕국의 기병대의 반격을 받고 군사의 태반을 잃었으며, 베오그라드의 중장보병대에 의해 또다시 대패하여 우여곡절 끝에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에 도착했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그림 입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지도...]
당시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그간 이들이 저지른 행위를 잘 알고 있어, 그들을 배에 태워 이슬람 영토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군중 십자군은 거기서도 계속 약탈을 하다 셀주크 투르크군을 만나 제리고르돈 요새와 키보토스 요새에서 전멸, 기사 레이날도는 항복하고 은자 피에르는 알렉시오스 1세에 의해 목숨만 구해 달아난다고 합니다..

[ 민중십자군 들의 행진..]
당시 이슬람 세계의 통치자들은 일차단결하지 못하고 제각각 분열되어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십자군의 공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습니다..
1차 십자군은(제 1차 십자군 원정 1096~1099년) 먼저 군중 십자군에 대한 승리로 자만하고 있는 니케아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안티오키아를 공략합니다..

[안티오키아 전투.... 1097~1986년 6월 28일까지...]

[귀스타프 도레의 '학살'... 십자군 들이 도시에 침략, 시민들을 학살하는 그림 인것 같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아데마르 주교가 사망함으로 해서 군웅들간의 유대감이 사라지고 군웅 할거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주교 아데마르를 그린 사본의 삽화 입니다.. 법관을 쓰고 성창을 쥐고, 십자군을 지휘하는 모습입니다..]
으음.. 또다시 다른 길로 세는구나.. 성창이란.. 라틴어로 Sainre lance, (자랑임?.. ) (라틴어 사전 발췌)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한 병사가 그의 죽음을 확인 하기 위해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는데 예수의 피가 묻었다고 여겨지는 창입니다... 가현설 논란도 있지만.. 여튼 이 창이름은 '롱기누스의 창'이라고 합니다..

주교 아마데르 가 롱기누스의 창을 찾았다고 하면서 십자군은 사기 상승(?).. 결국 예루살렘을 함락시켰습니다.. (간략 내용.. ) (뭔가 앞뒤가 안맞는 자료.. 쩝..)
여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1099년 마침내 예루살렘을 정복에 성공합니다...
성 안으로 난입한 십자군은 많은 시만들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 결과, 시리아에서 부터 팔레스타인에 걸쳐 이르는 중동지역에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몇 개의 십자군 국가가 세워졌습니다..

예루살렘 전투... 1099년 7월 15일
십자군이 40여일의 포위 공격 끝에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안에 무슬림들과 유태인들을 보이는대로 학살 합니다.. 성안에 남아 있던 그 누구도 이들의 시퍼런 칼날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이슬람 사원은 불에 탔고 시신은 산을 이루었습니다..

당시의 무슬림 역사가 '이븐 알 아시르'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지의 주민들은 그들의 칼날아래 쓰러졌다.. 프랑크인들은 일주일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알 아크사 사원에서 그들은 7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죽였다.." 또 다른 기록은 이렇게 전합니다.. "많은 이들이 죽었다.. 프랑크인들은 유태인들을 그들의 교회당에 몰아놓고 산 채로 태워 죽였다. 그들은 또한 성스런 유적들과 아브라함의 무덤을 파괴 하였다".
한 십자군 병사도 "예루살렘의 큰 광장이나 거리에서는 사람들의 머리나 팔다리가 산처럼 쌓여있고, 그들이 흘린 피가 온 시내에 발목 높이까지 차 흘러 내렸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사가들은 폭이 채 800미터도 되지 않은 예루살렘에서 14만명이 목숨을 읽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으음.. 포스팅이 많은 관계로..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갰습니다.. ㅇㅅㅇ;;;
오늘은 설날이니....? ..
십자군 국가에 대한 내용을 쓸것입니다..
(양해(?) 바람니다.. ㅇㅅㅇ;;) ...
(제 2차 십자군 원정은 다음에 쓰기로 하지요.)
[십자군 국가는 녹색계열의 색으로 표시 했더군요.. ]
제 1차 십자군 전쟁 후.. 장래 예루살렘을 지키기 위해,그리고 헬라 제국에서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던 안디옥(안티옥) 과 시리아를 관통하는 여행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이곳에 일종의 정부수립이 필요함을 느겼다고 합니다.. 정복지에는 예루살렘 왕국, 안티오키아 후령(侯領), 트리폴리 백령(伯 領 ) 에데사 백령 등 4개국이 들어섰습니다.. 이 중 가장 큰것은 예루살렘 왕국입니다...
성직자들은 신성체제를 수립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많은 논쟁을 거친 후 볼로냐의 고드프리가 왕의 칭호를 사양하고, 성묘 교회의 수호자이자 영주라는 칭호를 받아들여 이곳 예루살렘 왕국을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왕국 안에는 요한기사단,템플기사단. 조금 늦게 튜튼 기사단 등의 종교기사단이 편성되어 성지 방위의 주요 군사력을 담당했습니다..
제 1차 십자군 이후 레반트(근동 아시아의 팔레스타인 부근을 가리키는 지리적 용어 입니다 ㅇㅅㅇ] 이후
레반트 지역에 처음 세워진 국가 들을 말하며 다음의 4개 십자군 국가들이 있습니다.
에데사 백국 (1098 - 1144년) : 최초의 십자군 국가 입니다..
안티오키아 공국 (1098 - 1286년)
예루살렘 왕국 (1099년 - 1291년) : 1187년까지 수도는 살라흐 앗 딘 에게 함락된 이후 이크레로 옮겼다고 합니다..
트리폴리 백국 91104년 -1288년) : 트리폴리 자체는 1109년 정복.
종교기사단 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언급?.. 이거 뭔가 아닌듯.. )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기사들.. 라틴어로 Pauperes commilitones Christi Templique Solomonici ( " 또 다시 라틴어 사전에 발췌 했습니다..)
속칭은 성전 기사단 입니다...
서방 교회 기사 수도회 가운데 가장 유명한 조직입니다.. 대략 중세의 두세기 동안 존재하였으며 1096년 제 1차십자군의 활약을 기초로 확보된 예루살렘으로의 성지 순례를 떠났던 많은 유럽인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 되었습니다.. 1129년 로마 카톨릭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공인받게 되면서 세력이 빠르게 성장하게 됩니다..
성전 기사단원들은 그들만의 특징적인 복장인 붉은 색 십자가가 표시된 하얀색 겉옷을 입었으며, 대부분 십자군 전쟁의 격전지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성전 기사단의 초기 본부 '알 악사 모스크' 예루살렘의 성전 산 위에 있습니다..]

제 1차 십자군 원정 당시 예루살렘 정복(1099년) 이후 로마 카톨릭의 군사적인 성격을 띈 기사단으로 성지와 순례자들의 보호를 위한 조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600년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명을 받아 아봇 프로보스가 예루살렘에 병에 걸렸거나 몸을 다친 성지 순례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병원을 세웠습니다.. 병원조직은 1005년 칼리프 알 하킴이 병원과 부속 건물을 파괴했습니다.. 1023년 이탈리아 아말피와 살레르노 출신의 상인들이 이집트 칼리프의 허가를 얻어 병원을 다시 세웠는데 그 병원은 세례자 요한의 묘지에 세워졌고 베네딕토회 수사들의 봉사로 성지 순례자들을 위해 구호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 구호단체는 십자군 원정 이후로 군사적인 색채가 더해졌습니다.. 1099년 카톨릭 세력에 의해 예루살렘이 정복되고 예루살렘 왕국이 세워지자 군사조직으로 개편되었고, 무슬림들과의 전쟁을 통해 그 용맹성을 인정받고 성당 기사단과 함께 팔레스타인 지역의 중요한 카톨릭 종교기사단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로도스 섬의 기사단 성채..] [현재 까지도 몰타 기사단 이란 국가가 있습니다.. ,독립국으로 인정해주죠..]

튜턴 기사단 또는 독일 기사단 이라 합니다.. 튜턴 기사단은 오스트리아의 빈에 본부를 두고 있는 로마 카톨릭교회에 소속된 종교기사단 입니다. 튜턴 기사단이란 이름은 중세 십자군 원정 때 주로 독일인 기사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붙여졌습니다..
12세기 말 팔레스타인 아크레에서 처음 결성되었고 이후 다른 종교기사단(성전 기사단, 성 요한 기사단 등) 과 함께 십자군 국가에서 중요한 위치를 담당하였고 십자군의 중요한 항구 거점인 아크레의 방위를 담당하였습니다....

p.s: 엄청난 방대한 물량 같지만.. 사진때문에 그런것 같습니다..;;
출처는 위키백과,각종 블로그 자료,구글,야후 등 이용 했습니다... ;;
p.s2: 퍼가실때에는 "담가갑니다" 라고 해주세요.. 그리고 덧글 부탁드립니다 ㅇㅁㅇ!
끝까지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ㅇㅅㅇ;;
# by | 2009/01/26 13:00 | 세계사(고대~중대)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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